[이명수의 사람그늘] 엄기영의 큰절

누군가의 고민을 듣다가 ‘생각이 바뀌었다고 해!’라는 조언을 하면 그 순간 사람들은 속이 다 시원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뻔뻔하다는 의미와는 좀 다르다. 그만큼 사람은 자기 일관성에 대한 강박이 심하다. 그게 엉클어지는 순간 자신이 비겁하고 불안정한 사람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니 예전과 달라진 본인의 행태를 ‘생각이 바뀌었다’고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정교한 논리와 방어기제와 자기합리화가 총동원된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는 말조차 생략한 채 행동으로 엽기적 변신을 다짜고짜 보여주는 흔치 않은 이들도 있다. 강원도지사 한나라당 예비후보로 동분서주하고 있는 엄기영씨가 그렇다. 그가 한나라당 후보이건 민주당 후보이건 그건 중요치 않다. 정파적 입장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품위 혹은 최소한의 예의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열흘 전 엄씨는 한나라당의 한 행사장에서 그동안 당원 동지 여러분께 속 썩여 드린 걸 사과한다며 넙죽 큰절을 올렸다. 아마도 공천권력을 향한 눈도장의 의미가 컸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인사법은 용팔이가 각목을 들고 전당대회장을 휘젓던 시대의 전유물인 줄 알았다.

이런 풍경을 접할 때마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직업적 먹이사슬 피라미드의 최정점에 정치의 세계가 있다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블랙홀처럼 모든 걸 빨아들인다. 존경받는 학자든 사려깊은 시민운동가든 사랑받는 예술인이든 저항적 언론인이든 정치 앞에서는 대개 큰절하는 사람의 위치로 전락한다. 목도한 바로는 예외가 별로 없다. 그런 굴종과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얻을 만한 가치라는 건 세상에 없다. 인간의 욕망과 단견이 빚어내는 착시현상일 뿐이다.

그의 다짜고짜 변신 행보는 적나라하게 이어진다.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문화방송의 대표적 시사프로그램 ‘피디수첩’에 대해 흠결이 많았던 프로그램이라고 비난한다. 후배 등에 비수를 꽂는 변절자라는 극한의 분노와, 같은 사람인가 섬뜩할 정도라는 선후배들의 탄식이 이어졌지만, 그는 기자정신을 들먹이며 오류가 있다는 자신의 말이 뭐가 틀리느냐고 강변한다. 아무도 피디수첩이 무오류의 프로그램이라고 믿지 않는다.하지만 그건 아직도 정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피디수첩에 대해 문화방송의 최고책임자였던 엄씨가 할 말은 아니다. 최소한의 예의다.

예를 들어 송해 선생이 문화방송 ‘나는 가수다’란 프로그램의 사회자를 맡기 위해 수십년간 자신이 진행하던 한국방송의 ‘전국노래자랑’을 폄하하면서 ‘아마추어들의 노래에 질렸다. 공중파의 낭비였다. 진짜 가수들의 노래를 듣자’고 말하면 오랜 세월 그와 애환을 함께했던 사람들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월북한 아버지를 둔 사람은 더 강경한 반공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마찬가지로 그동안 자신과 대립각을 세웠던 바로 그 정당의 공천을 받기 위해 자기 정체성을 화끈하게 증명해야 하는 엄씨의 상황이 절박하긴 하겠다. 하지만 세상일에는 그의 말처럼 지켜야 할 선이 있는 법이다. 자기의 다급한 욕망을 달성하자고 삼십년 넘게 자신이 몸담았던 곳을 공개적으로 부정하고 비난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든 옳지 않다.

엄씨의 그런 행보 때문에 스마트한 앵커멘트를 들으면서도 ‘저거 진심에서 하는 말인가, 자기 말이기는 한 건갉’ 따위의 의심을 하게 되는 상황은 서글프다.

요즘 같은 서바이벌 오디션 시대에는 ‘오디션에서 1등만 먹는다면 어떤 수모도 견딜 수 있다’는 참가자들의 말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공천권을 따기 위해 어떤 굴종이나 변절도 기꺼울 수 있는 심정,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자기 품위를 1등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다. 세상 모든 이를 자신처럼 오디션이나 공천권 경쟁에 돌입한 사람으로 인식하면 삽질하는 건 순식간이다.

큰절을 준비하고 있을지 모를 또다른 ‘엄기영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마인드프리즘 대표·심리기획자, 트위터 @meprism

by poiu23 | 2011/03/24 09:28 | 주절주절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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